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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1. 11世 〉7. <부정공>수의부위훈련원봉사공휘각묘갈명(修義副尉訓鍊院奉事公諱珏墓碣銘)
1. 문헌 목록 〉11. 11世 〉9. <부정공>학생공휘무묘지명(學生公諱懋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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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정공>통사랑예빈시참봉무송공휘무묘갈명(通仕郎禮賓寺參奉撫松公諱懋墓碣銘)
通仕郎禮賓寺參奉撫松公諱懋墓碣銘 國朝乙巳之禍有若三灘趙公諱大春炳幾退藏謝絶世事是時我先祖文正公曁白玉峯先生與公志同氣合相與講磨於漾碧亭有酬唱詩膾炙於世石上刻三賢船遊錄人到于今稱之撫松公諱懋字德功即三灘公之胤子而早承庭訓遊於先子之門以孝友才行禮學著薦除禮賓寺參奉平日所交遊多一世宿德而安文康公邦俊金晚德大器其最著者也相與麗澤深究經義多所發明金晩德挽公詩有江南大老趙夫子篤厚風流世莫儔之句公問學行義淵源端的實罕其儔而醴源芝根信乎如程叔子之言也謹按其狀趙氏玉川著姓高麗檢校大將軍諱璋爲遠祖諱洪珪版圖判書諱佺封玉川君有諱元吉號農隱與圃牧陶冶諸賢爲道義交洪武己巳以侍中興鄭夢周偰長壽定策迎立恭讓王策勳一等加大匡輔國光祿大夫檢校門下侍中兼典工判書玉川府院君諡忠獻享淳昌武夷院諱瑜號虔谷事親至孝前後喪居廬繼母憂亦如之高麗屋社之日與諸賢入杜門洞及卒 世宗命葬以一品禮旌之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盖並褒其忠也享順天謙川祠諱斯文修義副尉左軍司正 贈吏曹參議諱智崙蔭補奉列大夫參禮道察訪與三昆季作亭共處扁以相好於公爲高祖也曾祖諱穩尚瑞院直長祖諱淑璟忠順衛余先祖文正公撰墓表考卽三灘公淵齋宋先生撰墓表妣延安李氏 贈吏議繼長女繼妣玄風郭氏副司直尹末女皆無育秉節校尉諱大楠及順天金氏寔本生考妣也公生於嘉靖庚戌以乙卯二月二十五日卒葬在順天住巖下道金谷負甲原配文化柳氏生員認女有婦德壬申七月四日卒墓雙塋有三男二女男長晫宣務郎次똹無嗣晬宣務郎 贈司僕寺正女長適文化柳永貞次適竹山安愼之牛山邦俊子晫子時聖通德郎號觀水亭以孝命旌庶子時立晬子時億通德郎 贈左承旨時聖子維綱維紀時億子維章 贈户曹參判維綱子之藩之賓之珣 崇禎後隱德不仕維紀子之翊維章子祺錫廷錫圭錫朋錫壽階嘉善同知中樞之藩子泰望號詠歸堂遊於金忠靖在魯之門以孝命旌泰望子崇夏遊於韓鰲川伯愈之門中司馬之珣孫器夏從尹屏溪鳳七遊餘不盡錄嗚呼距公沒三百餘年墓無顯刻遺集爲六丁所收所存斷爛嘉言善行未盡傳於世惜哉金晩德一句韻語足以槩公矣公十二世孫學洙以文學行義克世其家以其家狀請余銘余辭謝不敢而念昔世契亦有不可辭者銘曰維公問學淵源在玆三灘爲父文正爲師禮學才行日著華聞薦授一命志則在汶一世名碩交遊訊問晚德誄詞摹寫德義我銘昭之以詔千禩 鶴城 金容珣 謹撰 參奉 통사랑예빈시참봉무송공휘무묘갈명 (通仕郎禮賓寺參奉撫松公諱懋墓碣銘) 우리나라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삼탄(三灘) 조대춘(趙大春)공 같은 분은 그 기미를 알고 은퇴하여 세상일을 모두 사절하고 살았다. 그 당시 우리 선조인 문정공(文正公:김인후(金麟厚)를 말함)과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선생 및 조 선생은 지기가 많아 양벽정(漾碧亭)에서 서로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화답하였다고 바위 위에 세 어진 분이 배를 타고 놀던 기록이 새겨져 있어 지금까지 일컫고 있다. 무송공(撫松公)의 휘는 무(懋) 자는 덕공(德功)이니 바로 삼탄공의 아들이다. 일찍이 집안의 가르침을 받고 또 우리 선자(先子:하서선생)의 문하에 와 공부하였는데 효우(孝友)와 재행(才行)·예학(禮學)으로 알려져 예빈시 참봉에 제수되었다. 평일에 사귄 사람은 당시의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문강공(文康公) 안방준(安邦俊), 만덕(晩德) 김대기(金大器)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알려진 분이다. 그 분들과 서로 수양하고 경전의 뜻을 연구하여 발명한 바가 많았다. 만덕 김대기 선생은 공의 만사(輓詞)에서 「강남 늙은 학자 조 부자는 그 독후한 풍류 짝할 사람 세상에 없네(江南大老趙夫子篤厚風流世莫儔)」라고 하였다. 공의 학문과 행실은 그 연원(淵源)이 깊어서 실로 짝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 예원(醴源)과 지근(芝根)이 참으로 정숙자(程叔子:중국 송나라때 학자 정이(程頤)의 말과 같다. 삼가 공의 행장을 살피건대 순창조씨는 저명한 집안으로 고려 검교대장군 휘 장 (璋)을 원조(遠祖)로 하고 휘 홍규(洪珪)는 판도판서요 휘 전(佺)은 옥천군에 봉해졌다. 휘 원길(元吉)은 호가 농은(農隱)인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선생과 함께 도의로 사귀었다. 홍무 기사년에 시중(侍中)으로 정몽주·설장수(偰長壽)와 함께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一등 공신이 되어 대광보국 광록대부(大匡輔國光祿大夫)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겸전공판서옥천부원군(兼典工判書玉川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시호는 충헌(忠獻)이며 순창 무이원(武夷院)에서 향사한다. 휘 유(瑜)는 호가 건곡(虔谷)인데 어버이를 효도로 섬겨서 두 분에 상례 때 시묘살 이를 하였고 계모의 상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고려가 망하는 날 여러 어진 분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는데 후에 졸하자 세종(世宗)께서 一품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그리고 정려하기를, 「효자전부정조유의정려(孝子前副正趙瑜之閭)」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의 충성을 아울러 표창한 것이다. 순천의 겸천사(謙川祠)에서 제사한다. 휘 사문(斯文)은 수의부이(修義副尉) 좌군사정(左軍司正)인데 이조참의에 추증되고, 휘 지륜(智崙)은 음보(蔭補)로 봉령대부 삼례도찰방(參禮道察訪)이 되었는데 네 형제가 정자를 지어 함께 거처하면서 상호정(相好亭)이라 불렀는데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온(穩)은 상서원직장(尚瑞院直長)이며, 조 휘 숙경(淑璟)은 충순위인데 우리 선조 문정공(김인후)께서 공의 묘표를 지었다. 고는 바로 삼탄공인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선생이 묘표를 지었다. 비(妣) 연안이씨는 증이조참의 계장(繼長)의 따님이며, 계비 현풍곽씨는 부사직(副司直) 윤말(尹末)의 따님인데 모두 자녀를 기르지 못하였다. 병절교위 휘 대남(大楠)과 순천김씨(順天金氏)가 공의 생가 부모이다. 공은 가정 경술년(一五五○)에 출생하여 을묘년(一六一五)에 졸하여 순천 주암 아래 금곡(金谷) 갑좌(甲坐) 언덕에 장사하였다. 배 문화유씨는 생원 인(認)의 따님인데 부덕이 있었으며, 임신년 七월 四일 졸하여 무덤은 쌍봉으로 모셨다. 三남二녀를 두었는데 장남 탁(晫)은 선무랑(宣務郎)이요, 차남 길(똹)은 후사가 없고 수(晬)는 선무랑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큰 딸은 문화(文化) 유영정(柳永貞)에게 출가하고 다음 딸은 죽산(竹山) 안신지(安愼之)에게 출가하였으니 안신지는 바로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아들이다. 탁의 아들 시성(時聖)은 통덕랑인데 호는 관수정(觀水亭)으로 효자 정려가 있다. 서 자(庶子)는 시립(時立)이다. 수의 아들 시억(時億)은 통덕랑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추 증되었고 시성(時聖)의 아들은 유강(維綱)·유기(維紀)이며 시억(時億)의 아들 유장(維 章)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유강의 아들은 지번(之藩)·지빈(之賓)·지순(之珣)인데 명(明)나라가 망하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유기의 아들은 지후(之珝)요, 유장의 아들은 기서(祺錫)·정석(廷錫)·규석(圭錫)·붕석(朋錫)인데 수직(壽職:나이가 많은 것으로 내린 벼슬)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다. 지번의 아들 태망(泰望)은 호가 영귀당(詠歸堂)으로 충정공(忠靖公) 김재로(金在魯)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효자로 정려가 내려졌다. 태망의 아들 숭하(崇夏)는 오천(鰲川) 한백유(韓伯愈)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지순의 손자 기하(器夏)는 병계(屏溪) 윤봉구(尹鳳九)의 문하에서 배웠다. 기타는 다 적지 못한다. 아! 공이 가신지 三백여년이 되었는데 묘에 비석이 없고 유집(遺集)은 병화통에 남 은 것이 거의 없어 공의 아름다운 말과 선한 행실이 후세에 다 전해지지 않으니 애석 한 일이다. 그러나 만덕 심공의 한 귀절 만사가 공의 대략을 알 수 있게 한다. 공의 十二세손 학수(學洙)는 문학과 행실이 훌륭하여 가업을 잇는 분인데 공의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 나에게 명을 청한다. 나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겠고 또 세교 집안이므로 더욱 사양할 수가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의 학문은 維公問學 연원이 깊었네 淵源在玆 삼탄공이 아버지요 三灘爲父 문정공이 스승이었네. 文正爲師 예학과 재행이 禮學才行 날로 알려져 日著華聞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薦授一命 마음은 항상 志則在汶 당시의 명현들과 一世名碩 교유하여 학문닦아 交遊訊問 만덕공이 만사지어 晩德誄詞 공의 덕과 의 그대로 그려 놓았네. 墓寫德義 내가 이에 명으로 밝히어 我銘昭之 천년토록 교훈되게 하노라. 以詔千禩 학성(鶴城) 김용순(金容珣) 삼가 지음 註:※윤병계(尹屏溪 一六八一∼一七六七):학자. 이름은 봉구(鳳九), 본관은 파평(坡平), 병계는 호 권상하(權尚夏)의 문인 자의(諮議), 찬선(贊善) 등을 역임, 판서에 이르렀으며 한원진과 함께 호론(湖論) 주장.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 ※기구(箕裘):단단한 뿔을 바로잡아 활을 만든 자의 아들은 버들가지를 휘여 키를 만들고 쇠를 녹여 남비와 가마를 만든 자의 아들은 가죽을 연하게 달와 가돗을 만든다는 것이니 家業승계를 비유한 것. ※정숙자(程叔子):中國宋代學者로 有明한 伊川先生 ※예천(醴泉):단물이 나는 샘인데 예기(禮記) 하늘이 기름진 이슬을 내리고 땅은 甘泉을 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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